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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여행

코스트코 가격표 숫자가 말해주는 쇼핑의 힌트

그간 몇 주간 둘째 아이 학교 문제로 아이도, 나도 마음고생이 심했다. 몸도 마음도 지쳐가던 어느 날, 문득 둘째에게 아빠랑 바람이나 쐬러 갈 거냐고 넌지시 물었다. 평소 같으면 시큰둥했을 녀석이 웬일로 "ㅇㅇ" 하고 쿨하게 답을 보내왔다.​
막내와는 종종 여행을 다녔지만, 둘째와 단둘이 시간을 보낸 지는 꽤 오래된 것 같다. 어찌 되었든 이번 기회에 둘째와 막내를 모두 데리고 단양 소백산 자연휴양림으로 향했다.
산 정상부에 자리 잡은 휴양림은 이번이 처음인 듯하다. 해가 저물며 하늘을 물들이는 일몰과 석양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가만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간의 피로가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다.
휴양림에서 보낸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천천히 풀어보기로 하고, 모처럼 저녁을 물린 뒤 찾아온 한적한 시간에 노트북을 열어 가벼운 유통가 이야기 하나를 담아보려 한다.

 

창고형 매장의 대표 격인 코스트코의 매대를 걷다 보면 기묘한 고요함을 느낀다. 화려한 광고도, 요란한 1+1 판촉 행사도 없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지극히 정교하고 효율적인 비즈니스 모델과, 아는 이들에게만 보이는 '가격의 규칙'이 숨어 있다. 이 세계의 법칙을 가만히 복기해 본다.

 

 

코스트코의 시작과 자체 브랜드의 유래

​그 시작은 1976년, 미국에서 문을 연 '프라이스 클럽(Price Club)'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흔히 가격(Price)을 뜻하는 이름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공동 창업자인 솔 프라이스 부자의 성(姓)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프라이스 부자 밑에서 서른 해 동안 현장을 누비며 임원까지 올랐던 인물이 바로 짐 세네갈이다. 그는 1983년 독립하여 시애틀 인근의 '커클랜드'라는 작은 도시에 매장을 연다. 이것이 코스트코의 서막이다.

오늘날 코스트코 매출의 30% 이상을 책임지는 자체 브랜드(PB) '커클랜드 시그니처'는 바로 그 최초의 본사 거점지에서 이름을 딴 것이다. 이후 본사는 이사쿼(Issaquah)라는 지역으로 이전했으나, 발음이 너무 난해하다는 직관적인 이유로 최초의 이름인 '커클랜드'를 고수하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역사 속의 조우다. 후발주자였던 코스트코는 무섭게 성장해 결국 1993년 원조인 프라이스 클럽을 역으로 합병한다. 코스트코는 원조의 흔적을 지우지 않았다. 1994년 대한민국 서울 양평동에 한국 1호점을 출점할 당시, 그 간판에 내걸었던 이름 역시 다름 아닌 '프라이스 클럽'이었다.

 

​낮은 마진율과 연회비 중심의 수익 구조

​일반 대형마트가 25%, 백화점이 50% 안팎의 마진을 책정할 때, 코스트코는 마진율 15%라는 철저한 상한선을 지킨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집요할 정도의 소품종 대량 취급 전략이다.

​통상적인 마트가 10만 개가 넘는 상품 구색을 갖추는 반면, 코스트코는 단 4,000개 내외의 품목만 매대에 올린다. 품목당 선택지는 단 1~2개뿐. 이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납품업체들은 극도의 품질을 유지한 채 박리다매로 기꺼이 입점 경쟁을 벌인다. 소품종 대량 주문을 통해 단가를 최저로 낮추고, 거기에 최소한의 마진만 얹으니 가격이 저렴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러나 15%의 마진이 곧 이익은 아니다. 인건비, 물류비, 임차료를 제하고 나면 코스트코가 제품 판매로 남기는 최종 영업이익률은 고작 2% 안팎에 불과하다. 결국 이 거대한 기업을 지탱하고 영업이익의 절반 이상을 채우는 진짜 원동력은 상품 판매가 아닌, 전 세계 회원들이 지불하는 '연회비'다. 제품은 거들 뿐, 본질은 멤버십 비즈니스인 셈이다.

 

​가격표 끝자리 숫자가 가진 진짜 의미

​요란한 세일 공지가 없는 대신, 이들은 가격표의 끝자리 숫자로 상품의 상태를 조용히 고지한다. 미국 본사의 룰을 이해하면 국내 매장의 흐름도 한눈에 읽힌다.

  • ​정상 가격을 뜻하는 99와 90: 미국 코스트코의 끝자리가 .99달러라면, 한국 코스트코의 끝자리는 90원이다. 아무런 혜택이 적용되지 않은, 제값을 다 주고 사는 정가 제품을 의미한다.
  • ​할인율이 높은 재고 소진 가격 97과 70원: 가격 끝자리가 미국 기준 97, 한국 기준 70원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재고를 털어내기 위한 가격 조정이다. 시즌이 끝나가거나, 과다 재고를 소진해야 하거나, 후속 신제품 입고가 임박했을 때 이 숫자가 등장한다. 미국에는 이 '97'만 추적하는 사냥꾼(Hunter)들의 커뮤니티가 존재할 정도로 할인율이 좋다.
  • ​매장 자체 할인 가격 00원: 가격이 00으로 뚝 떨어진다면 그것은 본사가 아닌 해당 매장의 점포장이 직접 결단한 가격이다. 인근의 이마트나 롯데마트가 파격적인 할인을 감행할 때, 코스트코는 상권 내 최저가를 고수하기 위해 즉각적으로 가격을 00원으로 맞추며 맞불을 놓는다. 매장별 상황에 따라 가격이 다를 수 있는 이유다.
  • ​미국 매니아들이 주목하는 긴급 처분 가격 88: 박스 훼손품, 반품, 혹은 진열 상품 등의 이유로 긴급 처분이 필요할 때 붙는 초특가 코드다. 일반적으로 할인 폭의 깊이는 97 < 00 < 88 순으로 깊어진다.
  • ​제조사 지원 공동 판촉 가격 (29, 39 ... 89): 끝자리가 99나 97이 아닌 49, 79 등으로 끝난다면, 이는 코스트코와 제조사가 비용을 분담해 진행하는 공동 프로모션 상품이다.

 

​재입고가 없는 상품을 뜻하는 별표(★) 마크

​가장 유심히 보아야 할 것은 가격표 한구석에 조용히 찍히는 별표(★, Asterisk)다. 현장에서는 이를 '죽음의 별(Death Star)'이라 부르기도 한다. 계약 종료, 시즌 아웃, 혹은 모델 교체 등으로 인해 '이번 재고가 소진되면 더 이상 재입고되지 않음'을 뜻하는 최종 통보다.

​만약 매대에서 끝자리가 70원 이면서 동시에 ★ 마크가 선명한 제품을 발견했다면, 그것은 현재 가장 가격이 낮으면서 동시에 다시는 구할 수 없는 기회라는 뜻이다. 고수들이 망설임 없이 카트를 채우는 순간이다.

 

 

​이마트 트레이더스의 가격 표기 특징

​국내에서 코스트코의 대항마로 꼽히는 이마트 트레이더스 역시 자신들만의 독특한 프라이싱을 구사한다. 다만 이들은 할인을 숨기기보다 직관적으로 노출하는 편이다.

  • ​정상 가격에 주로 쓰이는 숫자 80원: 코스트코가 90원을 정상가로 쓸 때, 트레이더스는 12,880원처럼 끝자리에 8을 적극적으로 배치한다. 전통적으로 국내 유통업계가 숫자 '8'을 길한 숫자로 선호해 온 관성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 ​재고 정리나 행사 마감을 뜻하는 00원: 트레이더스에서 가격이 딱 맞아떨어지는 00원으로 끝난다면 이 역시 행사 마감이나 재고 정리를 뜻하는 경우가 많다.
  • ​파격적인 추가 할인 가격 40원 / 400원: 재고 압박이 극에 달했을 때 적용되는 이른바 '더블 할인' 상품의 끝자리다.

​마트의 매대는 단순히 물건을 늘어놓은 자리가 아니다. 치열한 이익 계산과 유통의 역사가 소리 없이 요동치는 거대한 정보의 격전지다. 숫자를 읽으면, 비로소 흐름이 보인다.